전체 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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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친척의 장례식 참석하기 2
우리집도 더 이상 공연을 보러가지 않게 됐다. 표를 못 살 형편은 아니었지만, 굳이 보러갈 만큼의 교양과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커서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그 시절이 떠오르면 그리움 비슷한 기분도 든다. 화려한 무대에서 장중한 음악이 울리고 곡예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지거나, 몸짓으로 고상한 말을 하는 발레리나들을 보면, 고양감과 흥분감이 기억났다. 하지만 왠지 굳이 시간을 내서, 검색을 해서, 표를 사서, 꾸역꾸역 가서, 두어 시간을 버틸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는다. 솔직히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돈도 시간도 아깝다. 어린 날에 비해 집중력은 떨어지고 계산속만 복잡해져 버려서일까? 그렇게 그 시절 큰아버지가 베풀어준 혜택을 꽤 오래 잊고 살다가, 어느날 부고를 들..
2026.06.02 -
가난한 친척과 공연 보러 가기 1
우리 아버지의 형제가 여섯, 나의 외갓집은 다섯 남매에 오촌 이모와 외삼촌도 있었다. 그렇게 친가와 외가 합쳐서 친척집이 열 집이 넘다보니, 내 어린 시절은 친척들과의 왕래만으로도 꽤 복작거렸다. 하지만 그중에서 정말 가깝게 지낸 친척은 둘째 큰아버지댁뿐이었다. 일단 우리 아버지 바로 손위 형이라 나이차도 적은 데다가,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집도 우리집처럼 딸이 둘이었다. 그집 사촌 자매와 우리 자매는 자주 같이 놀았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밥을 먹는 건 기본이고 소풍도 가고 여행도 같이 갔다. 그런데 우리의 외출에는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극장 나들이가 자주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오페라나 발레를 주로 보러 갔다. 어린 친척들이 같이 놀 때, 물론 그런 클래식..
2026.03.25 -
청담동 큰아버지
큰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아니었다. 그게 큰아버지 노릇하는 큰아버지의 기본적인 불만이었다. 아들을 일곱 형제나 낳은 나의 할머니는 맏아들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일 똑똑했고 제일 ‘인물’도 좋았다고. 그러나 이른바 ‘전쟁’ 때 끌려갔고,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큰아버지는 남은 여섯형제 중 맏이가 되어 명절을 감당해야 했다. 딱히 제사 같은 걸 지내지는 않았지만 친척들이, 특히 사촌지간인 아이들이 모일 장소는 필요했고 우리는 큰아버지댁에 모였다. 큰아버지댁은 꽤 멀었다. 비교적 시내에 가까운 우리집에서 버스를 갈아타며 산넘고 물 건너 어디론가 한참을 가야 했다. 그렇게 도착 동네는 생소했지만 꽤 으리으리했다. 나중에야 그곳이 청담동이라는 걸 알게..
2025.11.27 -
장례식에서 만난 큰외삼촌
그렇게 나름 평화로웠던 명절이 끝난 건, 본격적인 유산 정리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큰외삼촌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물려주었고 작은외삼촌과 누이들이 반발이 시작되었다. 점차 명절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대화도 안 하고 굳은 얼굴로 텔레비전만 보았다. 아예 오지 말라고 해서 큰외삼촌댁 방문을 거르는 명절도 늘어났다. 이게 아이러니인 것이, 가주 노릇을 잘 하라고 큰삼촌에게 유산 상속을 한 것인데 친척들을 챙기지 않는다면 의무 유기가가 아닌가. 내심 장남을 (개인적으로) 무시하면서도 (공적으로는) 나름 대접해주던 누이 셋의 반발이 제일 컸고 이럴 바엔 상속 재판을 하자는 말도 자꾸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그냥 조용히 서로 안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명절에 모이지 못하는 게 아쉬..
2025.05.13 -
명절에 만난 큰외삼촌
큰외삼촌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탁구가 떠오른다. 자그마한 큰외삼촌의 몸집에 딱 어울리는 운동이긴 하다. 게다가 커다란 눈에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함박웃음을 짓던 얼굴을 떠올리면… 아.. 그야말로 잔나비 같다는 감상까지 함께 따라오니 이걸 정겹다고 해야 할지 죄송하다고 해야 할지. 왜냐하면 큰외삼촌은 나의 외갓집의 장남인 분이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에도 여전히 조선시대 관습이 남아있다는 게 나로서는 참 통탄할 일이지만 사실 많은 집안이 여전히 꽤 가부장적일 것이다. 별볼일도 없는 나의 외갓집이지만 그곳도 나름 유교인지 전통인지 하는 분위기가 꽤 강건했다. 그런 집안에서 장남으로 자라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제는 ‘가주’가 된 분에게 원숭이 같다고 해도 되는 ..
2025.05.01 -
큰이모의 관심
그리고 두 번째 기억은 큰이모가 나에게 대학 입학 선물로 장지갑을 주던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슬며시 다가와 포장된 상자를 슥 내밀었다. 풀어보니 두툼한 붉은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런 지갑이었다. 너무 크고 무겁기도 하고 나랑 전혀 안 어울리는 스타일이라 아무래도 가지고 다니게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이런 ‘숙녀’의 물건을 선물한 건 처음이라서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쓰지도 않으면서 오래 간직했다. 실은 지금도 몇십년째 어딘가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걸 건네면서 큰이모가 짓던 의뭉스러운 표정, 그 표정은 마치 너도 이제 컸으니 내 친구, 혹은 대화상대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처럼 말이다. 알고 보니 큰이모와 나는 대학 전공이 같았다..
2024.11.13 -
큰이모의 관용
보통 나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이모를 ‘큰이모’라고 부르고 나의 엄마보다 나이가 어린 이모를 ‘작은 이모’라고 부르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큰이모는 나의 엄마보다 거의 열살 가까이 어린 분이다. 그 밑으로 여동생이 한 명 더 있어서 그분이 ‘작은이모’가 되었다. 나의 엄마가 바로 밑의 동생인 큰이모와 열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배다른 동생이기 때문이다. 나의 친외할머니가 죽고 후처로 들어온 계모 외할머니의 첫딸이 바로 나의 큰이모다. 그러니까 나의 큰이모는 장녀 비슷한 존재였다. 그리고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장녀 행세를 하려 했다. 콩쥐팥쥐까지는 아니라도 꽤 무서운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그렇게 구박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가족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었다. ..
2024.10.22 -
엄마가 돌본 삼촌, 작은외할아버지
어린 시절 나와 여동생은 아현동의 작은외할아버지 댁에 가끔 갔다. 자매 둘이서 며칠밤 자고 올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작은외할아버지란,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분이었다. 외할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었기 때문에, 내가 느끼기엔 ‘작은외할아버지’보다는 ‘큰아버지’ 느낌이 더 강했다. 그 댁은 지금의 아현동이 아파트촌이 되기 전, 개량 한옥 구역에 있었다.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ㅁ자 형태의 나무벽돌집이었다. ㅁ자 모양의 안뜰을 빙 둘러싼 나무 미닫이 문들에 누런 한지가 발라진, 그런 한옥집 말이다. 햇살이 조금 비추던 안뜰에서 목욕하던 추억이 강렬한 곳이었다. 작은외할머니는 안뜰에 큰 통을 놓고 더운 물을 받은 다음, 우리 자매를 홀딱 벗겨놓고 씻어주곤 했다. 그러면서 몹시 귀엽다는 듯 ..
2024.09.04 -
외할머니와 계모
내가 어릴 때 어느날, 엄마가 별 것도 아닌 일로 나한테 화를 냈다.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그냥 좀 뾰로통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날 이상하게 엄마는 혼자서 너무 속상해하더니 나를 안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미안해했다. 내가 얼떨떨해하고 있는데 엄마의 고백이 이어졌다. “엄마는 엄마가 일찍 죽었어. 그래서 엄마가 없었어. 그래서 엄마는 엄마가 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어.” 특정 단어가 동어반복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대충 이해는 됐는데, 이해가 안 갔다. 외할머니가 버젓이 살아서 여름방학 때도, 명절 때도, 집안 행사 때도 만나면 우리를 예뻐해주는데, 엄마한테 엄마가 없다고? 그때 처음 지금 나의 외할머니가 엄마의 계모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할아버..
2022.08.10 -
외할머니와 여름방학
지금 생각하면 나 어릴 때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이 여름 방학을 시골의 외갓집에서 보내던 풍습은 미국 아이들이 ‘여름 캠프’를 가는 관습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 영화에서 많이 보았는데, 아이들은 거기서 응석 받아주는 이 아무도 없는 단체 생활을 혹독하게 경험하고 돌아온다. 간혹 공포나 스릴러 영화처럼 무서운 사건사고의 순간도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모들이 아이를 여름 캠프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들끼리 여름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냥 아이들 없는 집에서 부부끼리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좀 쉬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말이다. 외갓집에 아이들을 보내는 우리나라 부모들은 어땠을까? 나도 어릴 때, 여름 방학이면 외갓집에 갔다.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변두리였고 오히려 외갓집이..
2022.06.08 -
외할아버지의 과묵함
나의 조부모들은 거의 내가 갓 성인이 된 무렵 돌아가셨다. 흔히 부모나 윗세대 어른들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 이미 돌아가신 후라면, 왜 그분들이 살아생전에 직접 그분들의 생애에 대해 여쭤보지 않았을까 후회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과거에 대한 자서전이고, 조부모들에 대해서 쓸 때도 나는 어디까지나 나와 그분들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나 나의 과거 기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분들이 말하는 그분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함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질문은 과거의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관계)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쓰려니 유독 내가 아는 게 없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는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
2022.05.22 -
친할머니의 싸움과 죽음
결국 중년이 된 지금의 나에게 ‘친할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그녀가 나의 엄마와, 즉 며느리와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던 모습이다. 같이 산 지 2-3년 후부터 시작된 그 싸움은 거의 10여 년이 이어졌고 그때부터 엄마는 이런저런 신경성 질병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가 너무 미워졌고 그때부터는 할머니에게 아예 말을 거는 일도 없어졌다. 내가 고등학생 때, 또다시 집 안이 떠나가라 싸우는 할머니와 엄마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학습참고서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자기 가슴을 치며 엄마가, 엄마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라고 더듬더듬 하소연 비슷한 것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엄마, 엄마, 하기에, 처음에 나는 아버지가 나의 엄마, ..
2022.05.15 -
친할머니는 셋방에서 지하방으로, 그리고 문간방으로
내가 꼬마 때, 친할아버지가 우리 가족과 살고 있을 때, 주말이 되면 나의 부모는 나랑 동생이랑 데리고 옆동네의 친할머니 집에, 정확히 말하면 친할머니가 살고 있는 어느 집 셋방을 방문하곤 했다. 작으나마 버젓한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아들(나의 아버지)이 셋방살이를 하는 어머니에게 찾아가는 심정은 꽤 착잡했을 테지만, 우리 집에는 이미 친할아버지가 살고 있으니, 친할머니는 당연히 우리와 살지 않으려 했다. 살 수 없었다. 나의 친조부모가 따로 살게 된 사연은 지난 글()에 썼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할머니 역시 다른 세 아들과 차례로 살아봤지만, 며느리들과 모두 싸우고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혼자 사는 할머니는 꽤 행복하고 편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 일곱을 키우며 살다가 ..
2022.01.28 -
친할머니의 별거 신화
네 명의 조부모 중 나와 가장 밀접했던 이는 친할머니였다. 그러고 보니 ‘친’과 ‘외’라는 접두어는 사전을 찾아볼수록 기가 막히지만… 어쨌든 이분이 나와 제일 ‘친’했던 조부모이기는 하다. 같이 산 기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친할머니는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 스타일로, 늘 새침한 표정이고 쉽게 누구에게 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주들에게도 물론. 예전에 큰어머니에게서 듣기론 손녀들에게만 냉랭했지, 손자들은 나름 이뻐했다고 한다. 큰어머니의 딸들은 한 번을 안 업어주더니, 작은어머니가 아들을 낳아가지고 방문하자 하루 종일 업어주었다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손자들의 방문 때만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2021.08.31 -
부모에 대해 쓰지 않는 자서전
흔히 자서전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면 먼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쓰기 시작할 것 같다. 나처럼 특정 테마(소재)를 정해서, 그 테마에 관한 최초의 기억부터 시작해 일대기를 쓰는 형식을 취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래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갈 수는 없다. 더구나 이 블로그에서 나는 ‘친척’들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아마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계속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본격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을 생각이다. 되도록이면 피해가고 싶다. 멀리 에둘러 가고 싶다. 만일 이 자서전 쓰기가 ‘목적지가 있는 여행’이라면 말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친척'에 대해 쓰기 시작할 거라고 했더니, "워오~” 탄성과 함께 “쓰실 수 있겠어요?” 하는 질문들이 들어왔다. ..
2020.10.07 -
친할아버지의 장례식과 서자들
(앞 글에 이어서) 하지만 나랑 할아버지가 늘 사이좋게, 혹은 데면데면하게만 지냈던 건 아니다. 우리 사이에도 불꽃 튀던 순간이 존재했다. 내가 뭔가 버르장머리없는 말을 하며 주장을 꺾지 않자, 할아버지가 내 따귀를 거세게 때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엉엉 울며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렀지만, 엄마는 의외로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할아버지 방에 가지 말라고만 했다. 엄마와 할아버지 사이 위계 관계를 볼 때,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항의를 하거나 하지는 못할 거라는 걸, 어리디 어린 나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유형, 무형으로 앙금이 생기리라는 건 기대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엄마의 돌봄 노동 중에 복수가 가해지겠지, 두고 봐라 하는 심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외출한 후, 엄마가..
2020.07.23 -
셋방 친할아버지의 호시절
나의 친척들 이야기를, 친척들에 얽힌 나의 자서전을, 실은 친할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속한 가부장제의 서열을 따라서, 그는 나의 친척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글의 톤은 반항적으로. 차갑게. 나에게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만 기억되는 그 남자. 노년의 모습만 나의 기억에 남기고 죽은 그는 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젊은 시절이, 장년기가 있었겠지. 그는 나의 선대이고 나는 그의 (수많은) 후손( 중 하나)이긴 한데, 그것이 그에게나 나에게나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아무래도 나에게 그는 조부모 4명 중의 한 명이고 그에게 나는 13명(도 넘을)의 손주들 중의 하나, 그것도 여자이니 의미의 비중이 다르겠지. 내가 아무리 친..
2020.07.07 -
사랑방 삼촌과 교포 숙모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 집 사랑방에는 삼촌과 할아버지가 살았다. 원래는 할아버지만 살았는데, 결혼 안 하고 낭인처럼 떠돌던 삼촌이 스리슬쩍 할아버지 방에서 얹혀 지내다가 아예 눌러 앉게 된 거였다. 할아버지는 괴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지만, 사근사근하고 놀기 좋아했던 삼촌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기억이 꽤 많다. 어린 동생이랑 기를 쓰고 화장실 문틈으로 목욕하는 삼촌을 엿보며 시끄럽게 놀려댔던 기억, 성애 장면이 많던 삼촌의 만화책 [고우영 삼국지]를 훔쳐보던 기억, 삼촌의 여자친구가 사온 과자를 빼앗아 먹으며 둘만의 알콩달콩한 시간을 방해하던 기억 등. 삼촌은 영화배우가 되려다가 실패하고 영화사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어린 나와 동생은, 영화배우는 무슨 일..
2020.02.27 -
노할머니와 자두 한바구니
요즘 비행기를 타게 되면 꼭 창가쪽 자리를 신청한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아마 자주 제주도를 가게 되면서 짧은 비행 시간에 책 같은 걸 읽기보다는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우리나라 국토의 풍경에 마음을 홀리게 된 것 같다. 동행은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처럼 왜 그러냐고 놀렸지만.. 얼마전에는 늦가을 오후 4시에 제주행 비행기 서쪽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런 시각 그런 방향은 처음인 듯했다. 그리고 노을에 가까워진 햇살이 드리운 장엄한 대지를 넋놓고 바라보았다. 수도권의 아파트 숲이 지나자 한강의 하구를 따라 아직은 녹색이 남아 있는 김포의 들녁이 나왔다. 물은 회색으로 반짝이고 논과 밭에서 일어난 먼지는 뿌옇게 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지도나 항공 사진으로 익숙..
2020.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