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7. 21:24ㆍ친척에 대한 회고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 집 사랑방에는 삼촌과 할아버지가 살았다. 원래는 할아버지만 살았는데, 결혼 안 하고 낭인처럼 떠돌던 삼촌이 스리슬쩍 할아버지 방에서 얹혀 지내다가 아예 눌러 앉게 된 거였다.
할아버지는 괴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지만, 사근사근하고 놀기 좋아했던 삼촌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기억이 꽤 많다. 어린 동생이랑 기를 쓰고 화장실 문틈으로 목욕하는 삼촌을 엿보며 시끄럽게 놀려댔던 기억, 성애 장면이 많던 삼촌의 만화책 [고우영 삼국지]를 훔쳐보던 기억, 삼촌의 여자친구가 사온 과자를 빼앗아 먹으며 둘만의 알콩달콩한 시간을 방해하던 기억 등.
삼촌은 영화배우가 되려다가 실패하고 영화사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어린 나와 동생은, 영화배우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만, 영화사 직원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삼촌에게 이것저것 자꾸 물어봤지만 대답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기름한 단발에 파마머리였던 삼촌은 기본적으로 술 마시는 게 일인 것 같았다. 맨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 같았고, 내 아버지가 출근하는 시간을 한참 넘어서까지도 자고 있는 삼촌이, 어린 나조차도 참 수상하다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던 삼촌이 어느 날 머리를 크게 다쳐서 들어왔다. 한동안 외출을 못하고 사랑방에 계속 누워 있었다. 그러자 삼촌의 애인인 미쓰 김 아줌마가 매일 문병을 와서 병간호를 해주었다.
미쓰 김 아줌마는 당시 배우로 일하고 있었는데, 나랑 동생도 삼촌이 일러주어서 텔레비전 연속극에 조연 배우로 출연하는 미쓰 김 아줌마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으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초췌한 꼴로 누워 있는 삼촌에게 포도를 한 알 한 알 따서 먹여주는 미쓰김 아줌마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던 나는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아줌마는 삼촌이 어디가 좋아요?” 그러자 미쓰 김 아줌마가 대답했다. “잘생겼잖아.”
그랬다. 사실 배우인 아줌마보다도 우리 삼촌이 더 인물이 좋은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멋진 아줌마가, 형님 집 허름한 사랑방에서 아버지(할아버지)와 같이 더부살이를 하고, 직장도 변변치 못한 것 같은 삼촌을 이렇게 좋아하다니,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도 안 돼!’ 소리치다가 삼촌에게 꿀밤을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영화사 일이 잘 안 풀렸던지, 삼촌은 선을 보았다. 미국 뉴욕에서 옷가게를 크게 하고 있는 부유한 교포 여자라고 했다. 삼촌은 곧 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고 우리는 다시는 삼촌을 보지 못했다.
미쓰김 아줌마는 그 후로도 가끔씩 텔레비전에 나왔다. 미쓰김 아줌마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엄마는 “얘들아, 미쓰김 아줌마 나왔다.” 하고 나와 내 동생을 큰소리로 부르곤 했다. 그러고는 한 동안 못 보다가, 내가 청년이 되고 미쓰김 아줌마가 중년이 된 후, 다시 텔레비전에서 발견했다. 이제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친구가 아닌, 주인공의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삼촌과도 한참 시간이 지나 내가 대학에 간 후에야 한 번 통화만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미국에서 삼촌이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에게서 건네받은 그 전화를,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되어 “삼촌!”하고 크게 소리치며 받았지만, 의례적인 안부 이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삼촌은 옷가게가 너무 잘 되지만, 너무 바빠 한국에 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또 세월이 많이 흘러, 삼촌이 암투병을 한다는 소식과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엄마는 삼촌의 부인과 통화를 했다며, 나의 사촌들이, “마미, 우리는 왜 아버지 친척을 아무도 안 만나?"라고 종종 묻는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얼마전 캐다나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을 보았다. 토론토의 한국인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들의 편의점 간판에는 “일주일에 7일 문을 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친척에 대한 회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할머니의 별거 신화 (0) | 2021.08.31 |
---|---|
부모에 대해 쓰지 않는 자서전 (0) | 2020.10.07 |
친할아버지의 장례식과 서자들 (0) | 2020.07.23 |
셋방 친할아버지의 호시절 (0) | 2020.07.07 |
노할머니와 자두 한바구니 (0) | 2020.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