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31. 00:06ㆍ친척에 대한 회고
네 명의 조부모 중 나와 가장 밀접했던 이는 친할머니였다. 그러고 보니 ‘친’과 ‘외’라는 접두어는 사전을 찾아볼수록 기가 막히지만… 어쨌든 이분이 나와 제일 ‘친’했던 조부모이기는 하다. 같이 산 기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친할머니는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 스타일로, 늘 새침한 표정이고 쉽게 누구에게 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주들에게도 물론.
예전에 큰어머니에게서 듣기론 손녀들에게만 냉랭했지, 손자들은 나름 이뻐했다고 한다. 큰어머니의 딸들은 한 번을 안 업어주더니, 작은어머니가 아들을 낳아가지고 방문하자 하루 종일 업어주었다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손자들의 방문 때만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으니, 손녀딸들인 나랑 동생을 제일 챙겨줄 만도 했는데 딱히 그녀에게 뭔가 예쁨을 받는다거나 선물을 받은 기억이 도무지 나질 않는다. 가끔 나랑 동생이랑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그럼 할머니가 반쯤은 흐뭇하고 반쯤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우리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민담, 전설을 대충 재생하거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재탕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그나마 유일한 또렷한 기억, 좋은 기억은, 어느 날 할머니가 나랑 동생에게 미스코리아 나갈 수 있는지 보자며 저 앞에 똑바로 서서 걸어보라고 했던 장면이다. 학교도 안 들어갔던 나이의 나와 동생은 킬킬거리며 미스코리아 워킹을 흉내를 내다가 제자리에 섰다. 그러자 할머니가 내 다리를 유심히 보더니 “0자네… 그럴 땐 살짝 엇갈려서 서면 돼.” 하면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심한 0자 다리였다. 동병상련을 느꼈던 걸까?
사춘기를 지나오며 늘 보아넘겼던 할머니의 모습은, 방 네 개인 우리 집에서 제일 문에 가깝고 작은 방을 사용했던 그녀가 정성들여 머릿기름을 바르고 박가분(?)인가 하는 파우더를 꼼꼼히 얼굴에 두드린 다음, 뉴똥 한복을 차려입고 노인정으로 나서다가, 나를 잠시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눈빛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녀의 한 쪽 눈에는 흰자만 남아 있었다. 난 워낙 어릴 때부터 보아와서 전혀 신경 안 쓰였는데, 할머니는 자신이 그래서 치장에 더 신경을 쓰는 거라고 씁쓸하게 말하곤 했다. 중년 이후 눈알이 점점 돌아가서 그렇게 되었다는데, 요즘도 가끔 있는 질병인 듯, 그래서 안과 수술을 받았다는 주변의 노인 분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다.
사실 나의 친할머니에게는 넷째인 나의 아버지 말고도, 살아 있는 아들이 다섯 더 있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는 미국으로 이민 갔고 또 한 아들은 아버지를 모셔야 했으니, 선택지가 그리 많은 편을 아니었다. 즉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따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연은 내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친가 친척들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이야기이자, 나에게 있어 그녀라는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는 스토리, 아니 마치 친가 친척 전체의 기원 신화와도 같이 느껴지는 스토리였다.
원래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애교 많은 남편이었던 할아버지는 늦게 들어올 때면 미안해하며 애들이 깨지 않도록 창문 밑에서 들여보내달라는 신호로 야옹, 야옹 울어댔을 정도였단다. 아들을 여섯이나 낳고도 여전히 성생활이 활발했는지, 할머니가 일곱째를 임신했을 때, 결국 그 다정함의 실체가 드러났다. 할아버지에게 작은댁(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길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쫓아내고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에 무슨 명절인지 잔치 때, 아들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한 자리에 모아놓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에이, 이제는 화해하세요~” 하고 누군가 말했고 완전히 토라진 할머니와 계면쩍은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를 억지로 가까이 앉힌 다음 사진을 찍는 장면. ‘ 두 조부모가 참 어려 보인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 두 사람의 태도를 지켜보던 나였을까, 아니면 이제 와서 회상하는 나일까? 아무튼 할머니는 다시는 그런 자리 근처도 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집에 돌아와서 ‘잘 마쳤다’고 보고했더니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리깐 채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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